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문단 편집) === [[맨해튼 계획]] === >''He was extremely intelligent, extremely quick. He understood everything when I had just a glimpse of what was being talked about. '' > > 오펜하이머는 극도로 머리가 좋았습니다. 이해하는 속도도 굉장히 빨랐습니다. 제가 논의 되고 있는 내용들을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할 때 그는 이미 모든 걸 다 이해하고 있더군요. >---- >[[맨해튼 계획]]의 이론 부서 부서장[* director of the T (Theoretical) Division, [[리처드 파인먼]], 로버트 서버 등도 여기에 소속되어 있었다.] [[한스 베테]]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1942년 [[맨해튼 계획]]이 시작되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과학자들은 [[우라늄]]을 이용한 폭탄의 실현 가능성을 탐색하고, 농축 우라늄을 생산하는 시설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에 독일이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속에 마침내 [[프랭클린 D. 루스벨트|루스벨트]]는 맨해튼 계획을 승인하고 미 육군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도록 하였다. 이 때 애국심에 불타던[* 아울러 본인도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나치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이 점은 당시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물리학자들 중 유태인(페르미의 경우는 아내가 유태인)이 다수를 차지했던 배경으로 작용했다.]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계획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중성자]]에 관련된 계산을 수행하였다. 프로젝트를 총괄하게 된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이미 원자폭탄 연구를 하고 있는 3개의 연구소와는 별도로, 실제로 원자폭탄을 설계하고 제작할 또 하나의 연구소를 계획하게 되었다. 그로브스는 먼저 기존의 3개 연구소의 소장들(콤프턴, 로런스, 우레이)에게 새로운 연구소까지 담당해 달라고 부탁하였지만, 그들은 이미 맡은 일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한 상황이었고, 그 중에 콤프턴은[* 기록에 따라서는 로런스] 자기 대신에 오펜하이머를 강력히 추천하였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제작에 필요한 지식은 누구보다 충분한 상황이었지만, 노벨상 수상자들까지 포함된 거대 연구진을 이끌기에는 경력이 부족하고[* 거대 조직을 이끌어본 경험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노벨상급의 수상 실적이 없었다!] 공산주의자라는 의심까지 받고 있었다.[* 과거 오펜하이머가 좌익정치인들에게 거액의 기금을 기부한 바 있고, 비록 본인은 공산당원은 아니지만 공산당원인 물리학자 친구들을 여럿 두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 중에도 공산주의자가 있었다.] 미군 상부는 오펜하이머를 채용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로브스는 강행하였으며 이때 맨해튼 엔지니어 지구에 그가 쓴 편지는 다음과 같다. >"상기 보내었던 오펜하이머에 대한 정보와는 관계 없이 7월 15일에 있었던 내 지시를 따라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에 대한 허가를 지체 없이 내리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는 프로젝트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입니다.'''" 오펜하이머는 처음 새로운 연구소의 위치로 자신의 농장이 있던 [[뉴멕시코주]]의 [[앨버커키]]를 추천하였고, 최종적으로는 근처의 [[로스 앨러모스]]가 선정되었다. 맨해튼 계획이 군계획이었기 때문에 오펜하이머는 당시 형식적으로 [[중령]] 계급을 받았고 심지어는 체력 검사도 받아야만 했다.[* 워낙 저체중이라서 떨어졌다고 한다.] 결국 오펜하이머는 군대식 환경이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의 연구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고, 상부와 타협해서 [[http://www.lanl.gov/|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를 군의 위탁을 받아 [[캘리포니아 대학교/버클리 캠퍼스|UC 버클리]]가 운영하는 연구 기관으로 바꾸었다. 그는 기존에 한번도 관리업무를 맡은 바가 없었으나 이를 훌륭히 완성하고 최대 6천 명의 연구원을 잘 설득하며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로브스가 프로젝트 전체에 필요한 인력과 예산, 자원의 관리를 맡았다면 오펜하이머는 직접 핵무기를 개발하는 이론-기술 분야의 최고 책임자 역할을 하였다. 결국 미국은 이들이 개발한 원폭으로 [[일본 제국]]을 항복시키고 [[태평양 전쟁]]을 끝낸다.[* [[소련-일본 전쟁|소련의 일본 공격]]이 더 큰 영향을 줬다는 주장도 있지만, 일단 전통적인 통념에 따르면 미국의 핵공격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맨해튼 계획으로 만들어진 핵무기가 살상력이 어마무시할 것이라고 예상되었기 때문에 그냥 도쿄만에 떨어뜨려서 위력을 과시해서 전쟁을 끝내는 방법도 고려되었으나, 오펜하이머는 일본 본토에 직접 떨어뜨려야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고 미의회에도 자신의 그런 의견을 밝혔다. 그는 폭탄 투하 임무를 책임진 장군들을 만나서 '''어느 정도의 고도에서 어떤 식으로 떨어뜨려야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할지를 설명하고 투하 방식을 지시하기까지 했다.''' 핵폭탄을 특히 [[히로시마]]에 떨어뜨리려는 이유도 두 도시가 평평하기 때문에 원자폭탄이 폭발해서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구석구석 관찰하기 좋았기 때문에 선정된 것이었다. 물론, 오펜하이머는 핵폭탄의 살상력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슬퍼하기도 했지만, 전쟁을 확실히 끝내는 것이 인명피해를 더 줄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까닭에 최선을 다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오펜하이머는 핵공격을 받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공식적으로는 어떤 방식으로도 사과하지 않았다. 종전 후 [[맨해튼 계획]]이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오펜하이머 역시 언론에 노출되기 시작하였고, 이 새로운 과학무기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는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장을 그만두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로 돌아갔지만 이후에도 여전히 대통령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무차별 살상을 하게 되는 대형 핵무기보다는 전술적인 소형 핵무기를 개발하도록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전술용 핵무기를 개발하는 계획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로 미국은 1950년부터 '셰이크 다운' 또는 '오프 태클'이라는 소련 공격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이것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발진한 미국의 핵폭격기들이 소련의 곳곳에 400에서 600개의 핵폭탄을 투여하는 제3차 대전 시나리오이다. 결국 이 계획 때문에 오펜하이머는 다시 한번 미국의 핵 정책에 경악하게 되었다. 오펜하이머는 특히 엄청난 살상력을 지닌 [[수소폭탄]]을 극렬히 반대하였다. 초기의 수소폭탄 컨셉은 [[폰 노이만]]과 울람의 컴퓨터를 이용한 계산결과[* 이때 계산을 위해 만든 것이 그 유명한 [[몬테 카를로 방법|몬테 카를로 알고리즘]]이다.] 실제 [[핵융합]]을 일으킬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고, 이 기회를 틈타 오펜하이머는 일반 자문 위원회 의장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수소폭탄 연구를 최대한 방해하였다. 하지만 1951년 [[에드워드 텔러|텔러]]와 울람은 성공 가능성이 높은 새로운 디자인을 제시하였고, 오펜하이머는 더이상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소련이 1949년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고 곧 수소폭탄도 성공하자, 반핵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고 있던 오펜하이머는 사회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오펜하이머는 1953년 12월 비밀정보접근 권한을 빼앗겼다. 이후 '오펜하이머 청문회'[* 소련이 원폭개발에 성공한 후 미국은 수소폭탄 개발계획을 서두르는 데 오펜하이머는 자문 위원회 의장 지위를 이용해 이를 반대했다. 결국 이 사건 이후 오펜하이머는 미국 정부의 눈 밖에 나게 되었고, 이후 비밀청문회의 서류가 분실된 것 등등 여러 이유로 공격을 받게된다.]로 보안 접근 권한을 빼앗기게 된다.[* 여담으로 이 오펜하이머 청문회에 대해서는 당시 [[조선일보]]에서도 기사로 실리기도 하였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404160023910101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4-04-16&officeId=00023&pageNo=1&printNo=9659&publishType=00010|#]]] 이후로는 미국이 실시한 최대의 수소폭탄 실험인 1954년 [[비키니섬 핵실험]]([[캐슬 브라보]])의 정보도 얻지 못했다. 친구 핵물리학자에게 '그냥 숫자 하나만' 말해달라고 부탁하자 그가 '15'라고 대답해줬다고. 하지만 그로서는 충분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3월 1일 폭발시험이 성공한 수소폭탄 규모가 15메가 톤이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리틀보이]]가 15킬로 톤, 나가사키에 투하된 [[팻맨]]이 21킬로 톤이었으므로 비키니섬 핵실험의 15라는 숫자는 당연히 메가톤급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